[역사속 오늘리뷰] 10월 2일 모스크바 공방전 발발
[역사속 오늘리뷰] 10월 2일 모스크바 공방전 발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10.02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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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41년 10월 2일은 모스크바 공방전이 일어난 날이다. 1942년 1월 7일까지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소련군이 100만명에 달하는 희생 끝에 승리하면서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길을 걷게 됐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그야말로 ‘소모전’의 끝판왕이었다. 나치 독일이나 소련이나 자국의 군인들 뿐만 아니라 자국 국민의 희생으로 전투를 치렀고, 그 전투 끝에 소련이 승리를 할 수 있었다.

독소전쟁의 핵심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소전쟁에서 가장 핵심 전투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장악함으로써 승리를 일궈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찬가지로 소련 역시 모스크바를 넘겨준다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사수했다. 원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나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협정을 맺었지만 결국 나치 독일이 이를 깨고 소련을 침공했다. 그러면서 나치 독일과 소련이 공방전을 벌였고, 끝내 나치 독일이 모스크바 턱밑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3갈래로 나눠 진격을 했는데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가 목표였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로 진격했던 군대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면서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남부 집단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중부집단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키고 남부집단군을 원조하게 했다. 9월 26일 키예프 공방전에서 나치 독일이 승를 하면서 남부지역이 평정됐다. 그리고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로 다시 진격을 하게 됐다. 나치 독일이 모스크바를 중요시했던 이유는 소련의 수도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지만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소련 각지에서 온 병력과 물자가 모스크바로 집결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독소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엄청난 희생을 내고

결국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독일의 진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나치 독일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40만명의 피해를 입었다. 물론 소련군 역시 100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희생됐다. 결국 나치 독일의 기세는 꺾이게 되면서 독소전쟁에서 패망의 길을 걷게 됐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나치 독일의 병력이 상당한 손실을 입으면서 그에 따라 전차 생산을 중단하고 보병장비와 지원장비 생산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만성적인 전차 부족을 겪어야 했고, 그것이 결국 독소전쟁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빠른 속도로 서부전선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전차 때문이다. 하지만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전차를 소진하고, 더 이상 전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면서 패망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소련의 승리 이유

소련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때문이다. 19세기부터 러시아제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일설에 의하면 러시아제국이 무너진 이유가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에 상당한 비용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만성적인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면서 그에 따른 반발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소련은 결국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했고, 그리고 서부지역에 있었던 생산기지를 동부지역으로 옮길 수 있었고, 인구의 이동 역시 상당히 이뤄질 수 있었다. 이는 나치 독일이 소련의 서부지역을 점령해 나가도 동부지역에 있던 생산기지에서는 무기 생산 등이 이뤄졌고, 동부지역에 있던 젊은이들을 군대로 징집할 수 있게 되면서 승리를 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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