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재수시절
자기가 원하는 대학시험에 실패한 사람들은 재도전을 위해 재수를 하였다. 재수생을 위한 명문 학원인 양영학원 대성학원 등의 경쟁률도 대단하였다. 나의 경우 한국에 원하는 대학이 없어 혼자서 영어공부에 집중하기로 하고 유년시절 지냈던 대전 목동 집으로 내려갔다. 사촌동생들을 가르쳐주며, 틈틈이 충남고등학교 탁구부를 지도하며 영어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몇 차례 아버님께서 서울에 올라와 양영학원에 다니라고 전갈이 왔지만, 난 그때마다 한국에 있는 대학교는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난 남북이 통일되려면 남한이 주도하여 평화적으로 하여야 하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북한을 조정하는 종주국인 러시아를 알아야 할 것 같아 하버드대학 러시아과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서는 학교선생의 고정된 월급으로 6자녀를 키우려면 근검절약을 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미국 유학을 보낼 수가 있냐며,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국에 있는 대학까지만 이라고 하신다. 그러던 중 1967년 11월 아버지께서 러시아를 공부하려면 우선 한국외국어대학 노어과에 들어가서 해외장학생이 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이 제안에 나는 다른 이유를 될 수 없어 결국 외대 노어과를 지원하여 다니게 되었다.
(3) 외대노어과 지원 및 대학생활
천하 부고를 다닐 때 외대(한국외국어 대학)는 안중에도 없었다. 서을대 이외에는 다른 대학 진학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외대가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고, 서울 대학교를 고집하며 연대 고대 진학을 생각지 않는 학생들에게 2차 대학으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내가 쉽게 합격하여 우습게 본 노어과 입학생 20명 정원 중 모두 전국의 명문교 출신들 이었다. 신입생들은 천하부고 나를 비롯하여,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 인천제물포고, 제주제일고, 광주제일고, 부산고, 마산고, 경기여고, 이화여고, 창덕여고 출신들이었다. 머리도 명석한 학생들로 구성된 외대 대학생활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다양한 외국어를 접 할 수 있었고, 외국인 교수도 많아 영어를 할 기회도 많았다. 나는 항상 코리아헤럴드 영자 신문을 지참하고 다녔다. 외대는 다른 일반대학하고는 다른 특별한 점이 많았다. 특히 외국어학과별 대항 올림픽 경기, 모의 유엔총회는 외대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사이었다. 우리과는 그 당시 막강한 국력을 가진 쏘련(러시아연방)의 대표로 모의 올림픽에 출전하여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기도 하였고, 모의 유엔 총회에 쏘련(USSR) 대표로 나가 열변을 토하기도 하였으며, 러시아 문화제, 러시아 연극 발표회, 러시아 춤 등 남들이 할 수 없는 이벤트를 개최하며 다양한 체험을 하였다. 비록 캠퍼스는 작았지만 세계화를 향한 열정과 도전과 비전과 우정과 화합이 넘치는 캠퍼스 이었다.
우리 노어과 친구들이 주로 가는 식당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조그만 한 주막이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손주처럼 잘 대해 주셨다. 우리는 그곳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찬반 토론 등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의 친구들과의 만남이 소중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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